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켄 덴노 (문단 편집) === 쇼토쿠 덴노 치세 === 준닌 천황의 폐위로 고켄 상황이 사실상 복위했다. 후세에는 고켄 상황이 [[중조]]한 이후를 '쇼토쿠 덴노'로 부른다. 이후 쇼토쿠 여제와 도쿄에 의한 정권 운영이 6년에 걸쳐서 계속되었지만, 황태자는 적격인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결정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덴표진고(天平神護) 원년(765년)에 전국적인 기근이나 '''가즈키 왕(和氣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복위 뒤의 정황은 불안정했다. 10월에 쇼토쿠 여제는 도쿄의 고향인 가와치(河內)국의 유게데라(弓削寺)에 행차했다. 이 행차 중에 도쿄를 '태정대신선사'(太政大臣禪師)로 임명하고 본래 신하에게는 행하지 않았던 군신의 배하를 도쿄에게 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이때의 행궁을 증축해 유이노미야(由義宮)을 지었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아와지에 유배되어 있었던 폐제 오오이([[준닌 덴노]])가 갑작스럽게 변사했다. 11월에는 본래 천황 즉위와 함께 행해지는 대상회(大嘗會)를 실시했는데, 예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승려에게도 출석을 허락하는 등 이례적인 것이었다[* 다만 즉위식은 행해지지 않았다]. 또해 이해에는 선제 쇼무 천황이 제정했던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에 따라 개간이 과열된 것에 대해 지샤(절과 신사)를 제외한 일체의 간전 사유를 금지했다. 덴표쇼호 2년(766년) 10월에는 해룡왕사(海龍王寺)에서 불사리가 출현한 일을 계기로 도쿄를 '법왕'(法王)으로 삼았다. 도쿄 휘하에는 법신(法臣)ㆍ법참의(法参議) 같은 승려 대신들이 두어졌고, 도쿄의 동생인 유게노 기요히토(弓削浄人)가 주나곤이 되는 등 도쿄와 유게씨의 세력이 확충되었다. 한편으로 태정관의 수석은 좌대신(左大臣) 후지와라노 나가테(藤原永手)였지만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를 우대신으로 발탁하는 등 이례적인 인사 임명이 예사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쇼토쿠 여제와 도쿄 법왕의 양두 체제가 확립되었다. 쇼토쿠 여제는 수시로 대사(大寺)에 행차했는데, 사이다이지(西大寺, 서대사)의 증축이나 사이류지(西隆寺, 사륭사)의 축조, 탑 100만 개 제작을 실시하는 등 불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한편으로 신사에 대한 보호 정책도 두터워져서, 이세 신궁이나 우사 하치만구 경내에 진구지(神宮寺, 신궁사)를 짓는 등 신•불 습합이 더욱 진행되었다. 또한 신사의 위계인 신계(神階) 제도도 시행되었다. 《속일본기》는 당시 정치와 형벌이 어려워져서 사소한 일로 극형에 처하거나 멀리 유배보내기도 했다며 혹평하고 있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원년 음력 7월 10일, 쇼토쿠 여제는 일찍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총책임을 맡고 있었던 시비츄다이(자미중대)를 모방한 독자적인 군사조직으로서 상설직 영외관인 '''나이주쇼'''(内豎省, 내수성)를 설치했는데, 《속일본기》는 장관격인 경(卿) 밑에 대보(大輔)ㆍ소보(少輔) 각 한 명, 대승(大丞)ㆍ소승(少丞) 각 두 명, 대록(大錄) 한 명에 소록(少錄)이 세 명이었다고 기록했다. 나이쥬쇼의 최고 장관으로는 도쿄의 친아우인 유게노 기요히토가 임명되었고, 대보와 소보는 각각 종4위상 좌위사독이었던 후지와라노 고레키미(藤原是公)와 종5위하 우위사독이었던 후지와라 유우의(藤原雄依)가 겸임했다. 군사기관으로 구상된 나이쥬쇼는 태정관을 거점으로 쇼토쿠 정권과 잠재적인 경쟁관계에 있었던 후지와라씨 주류나 황친 세력에 대항할 정치ㆍ군사력을 보관,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된 기관이었다. 이곳의 요인들은 정권의 핵심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자 궁정의 군사조직인 위부(衛府)를 지휘했다. 또한 쇼토쿠 여제와 도쿄의 정권 중추를 지지하는 경제기관으로서 '''조쿠시쇼'''(勅旨省, 칙지성)도 설치되었다. 진고케이운 3년(769년) 5월에는 이복 여동생인 후와(不破) 내친왕과 히카미노 시케시마로(氷上志計志麻呂)가 쇼토쿠 천황을 저주했다는 혐의로 그 이름을 강제로 개명당한 다음 유배되었는데, 이때 또다른 이복 여동생 이노우에(井上) 내친왕을 아내로 삼았던 주나곤 시라카베 왕(白壁王, 훗날의 [[코닌 덴노]])은 쇼토쿠 여제의 질시를 경계하여 일부러 술에 빠진 모습으로 환난을 피하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